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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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라면 몇 번이고 반할 수 있어요, 라고 나는 속마음으로 말했다. 심지어 그가 내 눈앞에 없는 상태에서. 문득 길을 걷던 와중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내 눈앞에 갑작스레 나타난다면 나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붉어질 테고 가슴이 홧홧해질 테고 표정을 통제할 수 없을 테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혼란스러워지겠지. 실은 오래전 그를 만났던 그 나날들이 이제는 꿈처럼 여겨지는, 현실이라 느끼지 못하는 기분이라 그래서 지금와서 그와 재회한다 해도 이게 꿈은 아닐까 싶겠지. 그와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이제 꿈처럼 아득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따름이다. 내가 그의 꿈을 너무 많이 꿔서 그런 걸까. 어쩌면 그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닐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때에 나의 삶에 거침없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그. 빠르게 나의 마음을 물들였다가 나의 머리를 헝클어놓으며 사라져버렸다. 재주가 많던 그 손끝에 나는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나는 다시 반할 수 있다, 그를 보기만 하면. 얼굴조차 기억에 희미한 그가 무엇 때문인지 그리 탐나 보이던지. 빛나던 손끝이 다였다.
아,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미완성인 채로. 부디 어리석지만은 않길. 이 모든 공부의 이유, 아니, 공부의 많은 이유가 그와의 재회 때문이라는 걸 나는 인지하고 있다. 텅 빈 나는 그가 알아차리지 않길. 그가 알고 싶도록 머릿속을 파헤쳐보고 싶도록 (마치 내가 그에게 그랬듯이) 혀끝에서 나오는 그 단어와 문장들이 쌓아올린 모래성에서 한줌 끌어다 쓴 모래처럼 흩어지지 않고, 견고하고 거대한 성의 일부분이 벽돌을 꺼내어 말하는 것처럼이나. 그 단어를 듣고 그 사람의 모든 생각을, 그 사람조차 깊이 인지하지 못했을 작고 미세한 부분들, 그늘에 가려진 부분들, 햇빛을 받아 선명한 빛으로 밝은 부분들, 그 색깔, 그 철근을 알고 싶어 견딜 수 없게끔. 아니, 적어도 궁금은 하게끔.
왜 항상 모래성을 쌓는 느낌인지 모르겠다. 언제나 문제는 조급함이라고들 하지만. 공부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나는 언제나 암기로 공부를 하려고 한다. 암기는 사고의 근간이라고 하지만, 어쩐지 나는 언제나 암기로만 머무르는 느낌이다. 그 자리에 정체되었다. 정보와 지식은 다른 거라고들 말하는데, 나는 수많은 정보를 두 손으로 그러모은다. 왜 그걸 지식화하지 못할까? 머릿속에 구겨넣는 공부법을 자랑스레 말하곤 했는데 그걸 '지식'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장기적인 암기도, 사고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아아, 왜 머릿속은 정보를 넣기를 싫어하는 걸까. 나는 왜 암기할 수밖에 없는 걸까. 왜 나는 암기를 요하는 공부를 하는 걸까. 문장 하나 읽어내는 게 왜 이리 힘이 들까. 나는 왜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말도 안 되는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을 그에게 보이는 걸까. 왜. 나는 왜 조급할까. 나는 왜 '내'가 없을까? 왜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 열광할까? 왜 겁이 많을까? 왜 해리포터처럼 용기 있지 않을까? 왜 주목받고 싶어할까? 왜 혼자 있고 싶어 할까? 왜 피해망상증을 가지고 있을까, 실은 아무도 날 신경쓰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왜지? 왜 나는 자유롭지 못할까? 가족희생양? 왜 나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할까? 평소엔 시간이 없다 하고, 시간이 있으면 다른 일에 빠져버리는 걸까? 왜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할까? 아, 이 질문의 답은 '나'이다. 나는 물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지, 내가 의지한 대로만 움직이면. 어쨌든.
글을 쓰면 이렇게 좋은데. 꼭 글을 쓰지 않을 때는 귀찮아서 않는단 말이야. 멍할 때도 머릿속에서 들어온 것들은 정리하는 중이라던데, 때때로는 그저 멍하니 있는 게 좋겠어. 그렇겠어.
投稿者 r5q3vd | 返信 (0) | トラックバック (0)